6卷3冊 : 四周雙邊 半郭 19.6 x 14.4 cm, 有界, 10行19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0.7 x 19.4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영의 시문과 부록을 모은 책이다. 예안 출신. 김효로(金孝盧)의 증손 으로, 할아버지는 김유(金綏)이고, 아버지는 현감 김부륜(金富倫)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부호군 신수민(申壽民)의 딸이다. 임진왜란이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류성룡의 막하로 자진 종군했으며, 당시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吳維忠)과 유격장 노득공(盧得功) 두 사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하였다. 그 뒤 1612(광해군 4)년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정치를 비관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 독서로 나날을 보내었다. 1624(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인조를 찾아 나섰 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김요형(金耀亨)을 시켜 소를 올리게 하고서 돌아왔 다. 뒤에 신하로서 아들을 시켜상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다는 격렬한 상소가 있었으나 인조가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그 뒤로도 학덕을잊지 못한 인조가 장령․보덕․헌납․사간 등 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했으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시 몇 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래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 밖 출입을 삼가며오가 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 세상에서 영남의 제1인이라고불렀다. 1689(숙종 15)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하사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 문집은 필사본으로전해오다가 1772(영조 48)년 그의 현손 굉(紘) 등이 도산서원에서 편집,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이상정의 서문과 책 끝에 이세택(李世澤)과 굉의 발문이 있다. 권1∼3에시 326수, 권4․5에 서(書) 24편, 소 2편, 제문 6편, 표․전(表箋) 4편, 전(傳)․기․녹(錄) 각2편, 권6은 부록으로 행장 2편, 묘갈명 1편, 제문 10편, 만사 28수 등이 수록 되어 있다. 시는 짤막한 절구보다는 고시․율시․배율이 많이 실려 있으며, 서는 친지와 아들․조카들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소 중 하나는 인조가벼슬을 내려 부른 데 대하여 사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내의 유생들과 함께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5현의 문묘종사를 청한 내용인데, 이 상소는 오르지 않았다.